지난 시간에 이어 부모의 무관심이 자기 인생을 파괴했다고 믿는 매럴린에 관해 얘기해 보자. 매럴린의 상처는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일이다. 그런데 부모의 무관심에 대해 연구하는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매럴린은 같은 경험을 한 성인 여자 3,000명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학자에게는 성장 과정의 이 핸디캡을 극복한 일부와 그러지 못한, 다시 말해 평생 동안 이 문제와 씨름하는 나머지 사람들이 눈에 띌 뿐이다. 부모의 무관심이란 그에게는 재미있는 연구 주제이다. 이는 매럴린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매럴린의 경험은 특수한 게 아니라 흔하고 전형적인 일에 속한다.
사회학자는 매럴린의 상처를 비개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 매럴린이 보기에는 개인적인 상처다. 두 관점 모두 타당성이 있다. 같은 상황을 보는 두 개의 다른 방식이라 하겠다. 이 두 관점을 모두 확보할 때 사람은 타인에게서 받는 자극에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다. 개인적 아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던 당신의 눈에 어느 날 이 보편적인 면이 감지되는 순간, 당신의 구체적인 상처가 당신을 반드시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비개인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 대해 경고하려 한다. 개인적인 면이 강조될 때 보다 훨씬 드물게 일어나는 경우이긴 하지만, 상처의 비 개인적인 면만 보는 태도도 역시 나름대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상처의 보편적인 차원만을 발견할 때, 그것은 종종 그것을 부정하는 태도로 표현된다. 고통스러운 일을 사소한 일이라고 일축해 버리거나 상처 준 사람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그 사건이 야기한 피해를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고통받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어디까지나 사건의 개인적인 면을 찾아내려고 애써야 한다.
나나 남에게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한 바람직한 반응은 고통에 포로처럼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고통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남이 겪은 고통을 대할 때는 그러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상처 역시 그렇게 다룰 수 있다.
어떤 일을 덜 개인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우리가 상처 받은 일을 좋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부모의 태만이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해서 매럴린에게 자기 어머니의 행위가 해명 되지는 않는다. 어머니 역시 고통 속에 있었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도 아니다. 부모의 자식 소홀이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일반적인, 그러나 매우 어려운 문제임을 이해하면 매럴린이 자기가 겪은 고통을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비개인적인 면을 통찰해도 개인적으로 받는 충격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두 면은 서로 공존하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에만 골몰해 있을 때, 매럴린은 어머니가 자기에게 평생 지고 가야 할 상처를 주었다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학대 받았다고까지 생각했다. 이는 곧 그녀가 인생의 어려운 체험을 가지고 장기간 지속되는 울화를 빚어냈다는 말이 된다.
오래 전에 겪었던 마음 상한 일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다면, 이는 우리가 그 일에 너무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증거다. 상처를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면 이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 몸이 스트레스 호르몬을 배출한다. 이 호르몬은 반격 – 도주 반응을 촉진해 우리 심신이 불쾌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한 달 전에 겪은 일 때문에 아직도 불쾌하게 느끼고 있다면, 이는 당신이 그 일을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나를 위한 선택 용서 용서- 용서는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원하는가?’ 중에서
지난 시간에 이어 부모의 무관심이 자기 인생을 파괴했다고 믿는 매럴린에 관해 얘기해 보자. 매럴린의 상처는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일이다. 그런데 부모의 무관심에 대해 연구하는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매럴린은 같은 경험을 한 성인 여자 3,000명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학자에게는 성장 과정의 이 핸디캡을 극복한 일부와 그러지 못한, 다시 말해 평생 동안 이 문제와 씨름하는 나머지 사람들이 눈에 띌 뿐이다. 부모의 무관심이란 그에게는 재미있는 연구 주제이다. 이는 매럴린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매럴린의 경험은 특수한 게 아니라 흔하고 전형적인 일에 속한다.
사회학자는 매럴린의 상처를 비개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 매럴린이 보기에는 개인적인 상처다. 두 관점 모두 타당성이 있다. 같은 상황을 보는 두 개의 다른 방식이라 하겠다. 이 두 관점을 모두 확보할 때 사람은 타인에게서 받는 자극에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다. 개인적 아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던 당신의 눈에 어느 날 이 보편적인 면이 감지되는 순간, 당신의 구체적인 상처가 당신을 반드시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비개인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 대해 경고하려 한다. 개인적인 면이 강조될 때 보다 훨씬 드물게 일어나는 경우이긴 하지만, 상처의 비 개인적인 면만 보는 태도도 역시 나름대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상처의 보편적인 차원만을 발견할 때, 그것은 종종 그것을 부정하는 태도로 표현된다. 고통스러운 일을 사소한 일이라고 일축해 버리거나 상처 준 사람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그 사건이 야기한 피해를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고통받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어디까지나 사건의 개인적인 면을 찾아내려고 애써야 한다.
나나 남에게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한 바람직한 반응은 고통에 포로처럼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고통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남이 겪은 고통을 대할 때는 그러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상처 역시 그렇게 다룰 수 있다.
어떤 일을 덜 개인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우리가 상처 받은 일을 좋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부모의 태만이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해서 매럴린에게 자기 어머니의 행위가 해명 되지는 않는다. 어머니 역시 고통 속에 있었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도 아니다. 부모의 자식 소홀이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일반적인, 그러나 매우 어려운 문제임을 이해하면 매럴린이 자기가 겪은 고통을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비개인적인 면을 통찰해도 개인적으로 받는 충격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두 면은 서로 공존하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에만 골몰해 있을 때, 매럴린은 어머니가 자기에게 평생 지고 가야 할 상처를 주었다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학대 받았다고까지 생각했다. 이는 곧 그녀가 인생의 어려운 체험을 가지고 장기간 지속되는 울화를 빚어냈다는 말이 된다.
오래 전에 겪었던 마음 상한 일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다면, 이는 우리가 그 일에 너무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증거다. 상처를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면 이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 몸이 스트레스 호르몬을 배출한다. 이 호르몬은 반격 – 도주 반응을 촉진해 우리 심신이 불쾌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한 달 전에 겪은 일 때문에 아직도 불쾌하게 느끼고 있다면, 이는 당신이 그 일을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분명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나를 위한 선택 용서 용서- 용서는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원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