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사실 한가지로 눈을 돌려 보자. 마음이 상하는 체험이 눈에 드러날 만큼 뚜렷하게 일어났든 애매한 형태로 일어났든 관계없이, 그 일에 관련된 사람은 누구나 각각 서로 다른 줄거리를 말하게 되어 있다. 내가 마음이 상한 사람이건 아니면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 장본인이건 간에,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은 누구나 서로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인지한다. 사건을 지켜본 사람, 친구, 가족 등 모두들 사건의 양상에 대해 그들 나름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람은 누구나 당연히 자기 나름의 개인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 관점은 각자가 맡은 역할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관점에서 사건의 경과를 아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서술해 주는 ‘바로’ 그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한 단 하나의 이야기는 없다. 다만 여러 개의 관점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당신이 서술하는 이야기는 이 일에 대한 당신의 관점을 반영할 뿐 아니라 일정한 주제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주제를 선정할 때 우선 당신은 많은 경우 희생자로 보일 것인지 아니면 용사로 보일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또는 다른 사람들을 영웅이나 악당 가운데 어느 쪽으로 묘사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당신이 사려 깊게 처리한 일들이 이야기의 핵심에 놓일 때가 있다. 때로는 당신의 업적이 전면에 부각될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이야기의 중점이 당신에게 아주 끔찍했던 경험을 묘사하는 데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실을 객관적으로 집적한 결과물이 아니다.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할 때면 우리는 그에 걸맞게 이야기 하게 마련이다. 당신의 이야기는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당신의 생각을 전한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목적도 있다. 당신의 이야기가 어떤 종류인가에 따라 당신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력도 함께 결정된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함으로써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상처 받은 상황이 우리에게 끼친 부정적인 영향에 갇혀버리곤 한다. 공격을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과거에 일어난 일의 책임을 공격한 상대방에게 넘기는 바로 그 시점에서 우리가 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게 큰 문제라 하겠다. 타인의 잔혹함을 마주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무력감을 그려내니, 그 이야기가 원망의 넋두리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지 않은가?
연구에 따르면 마음 상한 체험에 관한 이야기는 그 사람이 상처를 준 사람인가 받은 사람인가, 즉 처지에 따라 각각 달라진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상황, 예를 들어 자동차 사고 같은 상황을 참가자들에게 묘사해 주고 나서 그 반응을 살펴보는 실험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 역할을 자유로이 선택하여 이 이야기의 빈 곳을 마저 채우는 게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실험 결과는 한 가지 사실을 뚜렷이 보여 주었다. 즉, 가해자 입장에 선 사람은 피해자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상황을 본다는 점이다. 피해자로서 얘기하는 경우에는 누구나 사건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최소화 하는데 주력하면서 가해자를 비난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칠 목적으로 가해자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사고를 일으켰던 것 일 뿐, 자기 자신은 사건과 관련해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가해자의 관점에서 느낌을 보고한 사람들은 위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사건의 책임을 피해자 쪽에 더 많이 두는 반면, 사건으로 인한 실제 피해는 되도록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했다.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보고는 둘 중 어느 그룹에서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두 그룹 모두 자신들의 관점을 가장 유리하게 그려내는 이야기를 제출했을 뿐이다. 모두가 동의하는 객관적인 사실이란 없다는 얘기다.
‘나를 위한 선택 용서 용서- 용서는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원하는가?’ 중에서
단순한 사실 한가지로 눈을 돌려 보자. 마음이 상하는 체험이 눈에 드러날 만큼 뚜렷하게 일어났든 애매한 형태로 일어났든 관계없이, 그 일에 관련된 사람은 누구나 각각 서로 다른 줄거리를 말하게 되어 있다. 내가 마음이 상한 사람이건 아니면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 장본인이건 간에,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은 누구나 서로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인지한다. 사건을 지켜본 사람, 친구, 가족 등 모두들 사건의 양상에 대해 그들 나름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람은 누구나 당연히 자기 나름의 개인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 관점은 각자가 맡은 역할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관점에서 사건의 경과를 아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서술해 주는 ‘바로’ 그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한 단 하나의 이야기는 없다. 다만 여러 개의 관점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당신이 서술하는 이야기는 이 일에 대한 당신의 관점을 반영할 뿐 아니라 일정한 주제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주제를 선정할 때 우선 당신은 많은 경우 희생자로 보일 것인지 아니면 용사로 보일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또는 다른 사람들을 영웅이나 악당 가운데 어느 쪽으로 묘사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당신이 사려 깊게 처리한 일들이 이야기의 핵심에 놓일 때가 있다. 때로는 당신의 업적이 전면에 부각될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이야기의 중점이 당신에게 아주 끔찍했던 경험을 묘사하는 데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실을 객관적으로 집적한 결과물이 아니다.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할 때면 우리는 그에 걸맞게 이야기 하게 마련이다. 당신의 이야기는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당신의 생각을 전한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목적도 있다. 당신의 이야기가 어떤 종류인가에 따라 당신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력도 함께 결정된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함으로써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상처 받은 상황이 우리에게 끼친 부정적인 영향에 갇혀버리곤 한다. 공격을 너무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과거에 일어난 일의 책임을 공격한 상대방에게 넘기는 바로 그 시점에서 우리가 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게 큰 문제라 하겠다. 타인의 잔혹함을 마주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무력감을 그려내니, 그 이야기가 원망의 넋두리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지 않은가?
연구에 따르면 마음 상한 체험에 관한 이야기는 그 사람이 상처를 준 사람인가 받은 사람인가, 즉 처지에 따라 각각 달라진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상황, 예를 들어 자동차 사고 같은 상황을 참가자들에게 묘사해 주고 나서 그 반응을 살펴보는 실험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 역할을 자유로이 선택하여 이 이야기의 빈 곳을 마저 채우는 게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실험 결과는 한 가지 사실을 뚜렷이 보여 주었다. 즉, 가해자 입장에 선 사람은 피해자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상황을 본다는 점이다. 피해자로서 얘기하는 경우에는 누구나 사건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최소화 하는데 주력하면서 가해자를 비난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칠 목적으로 가해자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사고를 일으켰던 것 일 뿐, 자기 자신은 사건과 관련해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가해자의 관점에서 느낌을 보고한 사람들은 위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사건의 책임을 피해자 쪽에 더 많이 두는 반면, 사건으로 인한 실제 피해는 되도록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했다.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보고는 둘 중 어느 그룹에서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두 그룹 모두 자신들의 관점을 가장 유리하게 그려내는 이야기를 제출했을 뿐이다. 모두가 동의하는 객관적인 사실이란 없다는 얘기다.
‘나를 위한 선택 용서 용서- 용서는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원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