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로 인한 스트레스 호르몬의 영향을 받고 있는 동안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현재 우리가 겪는 불쾌한 감정의 책임을 상처 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건 바로 우리 감정을 지배할 권한을 그 사람 손에 위임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이 권한이 그 남의 손에서 슬기롭게 사용될 가능성은 어느 모로 보나 희박하게 마련이고, 그 결과 우리는 계속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자기를 전혀 염려해 주지 않는 남들에게 이렇게 자기에 대한 지배력을 넘겨주는 사람들은 깜짝 놀랄 만큼 많다.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기분 나빠하다 보면 그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리고, 급기야는 우리 자신이 보다 더 강력한 다른 사람의 희생물이 된 듯 느끼게 된다. 스스로 매우 기분 나쁜 상태에 있음을 마음과 몸으로 끊임없이 기억하는 과정에서 무력감도 생겨난다. 우리 몸의 이와 같은 자체 보호 반응을 우리를 공격한 사람 탓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큰 실수다. 이 실수로 인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우리 손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 손으로 들어가 버린다.
스텐은 알콜 중독자인 어머니 손에서 매우 험하게 자랐다. 주로 밖으로 도는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아들을 때렸다. 술에 잔뜩 취해 정신을 잃은 어머니가 소파에 누워있는데 친구들이 찾아와 당황했던 일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날마다 어머니와 싸웠고, 그 다음은 스탠을 때리는 게 정해진 순서였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그는 결국 집을 나오고 말았다. 그 이후 부모 자식 관계는 거의 끊어진 셈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중 아무도, 그의 편지나 전화에 답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더욱 고약한 건 어머니가 가족이 붕괴된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스탠이 전화를 할 때 마다 어머니는 늘 그가 아버지를 속상하게 했다든가 가정을 와해시켰다며 비난하곤 했다. ‘네가 가정을 망가뜨렸다’며 전화에 대고 소리소리 지른 게 마지막이었다. 어머니는 그 전화 통화 직후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스탠이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그렇게 보내야 했던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가 현재 겪고 있는 분노의 책임을 어머니에게 떠넘기는 것이 이제 와서 무슨 가치가 있을까 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어머니는 가정과 자녀에게 무관심하고 또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사태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 자기가 인생에서 저지른 실수와 만성적 분노를 어머니 탓으로 돌리는 한, 스탠은 어머니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 셈이 된다. 그런데 더 심각한 사실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즉 몰인정할 뿐만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던 어떤 사람에게 자기의 힘을 계속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탠의 경우처럼 자기를 괴롭힌 사람에게 자기 감정을 지배할 권리를 위임하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본다. 자신을 부정하게 대한 이들에게 자기를 좌지우지할 힘을 양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다.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동업자에게, 당신을 속여온 연인에게 그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은 부당하게 받은 상처로 인한 문제를 푼다면서 사실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스탠이 당면한 과제는 자기 인생을 확실히 살아가면서 상처에서 회복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탠이 해결한 방법인 ‘탓하기’가 그를 도중에 멈춰 서 있게 하고 있었다. 탓하기는 상처 입힌 사람과의 관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스탠으로 하여금 무력감과 고통을 느끼도록 했다.
‘나를 위한 선택 용서 용서- 용서는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원하는가?’중에서
상처로 인한 스트레스 호르몬의 영향을 받고 있는 동안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현재 우리가 겪는 불쾌한 감정의 책임을 상처 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건 바로 우리 감정을 지배할 권한을 그 사람 손에 위임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이 권한이 그 남의 손에서 슬기롭게 사용될 가능성은 어느 모로 보나 희박하게 마련이고, 그 결과 우리는 계속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자기를 전혀 염려해 주지 않는 남들에게 이렇게 자기에 대한 지배력을 넘겨주는 사람들은 깜짝 놀랄 만큼 많다.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기분 나빠하다 보면 그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리고, 급기야는 우리 자신이 보다 더 강력한 다른 사람의 희생물이 된 듯 느끼게 된다. 스스로 매우 기분 나쁜 상태에 있음을 마음과 몸으로 끊임없이 기억하는 과정에서 무력감도 생겨난다. 우리 몸의 이와 같은 자체 보호 반응을 우리를 공격한 사람 탓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큰 실수다. 이 실수로 인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우리 손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 손으로 들어가 버린다.
스텐은 알콜 중독자인 어머니 손에서 매우 험하게 자랐다. 주로 밖으로 도는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아들을 때렸다. 술에 잔뜩 취해 정신을 잃은 어머니가 소파에 누워있는데 친구들이 찾아와 당황했던 일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날마다 어머니와 싸웠고, 그 다음은 스탠을 때리는 게 정해진 순서였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그는 결국 집을 나오고 말았다. 그 이후 부모 자식 관계는 거의 끊어진 셈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중 아무도, 그의 편지나 전화에 답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더욱 고약한 건 어머니가 가족이 붕괴된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스탠이 전화를 할 때 마다 어머니는 늘 그가 아버지를 속상하게 했다든가 가정을 와해시켰다며 비난하곤 했다. ‘네가 가정을 망가뜨렸다’며 전화에 대고 소리소리 지른 게 마지막이었다. 어머니는 그 전화 통화 직후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스탠이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그렇게 보내야 했던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가 현재 겪고 있는 분노의 책임을 어머니에게 떠넘기는 것이 이제 와서 무슨 가치가 있을까 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어머니는 가정과 자녀에게 무관심하고 또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사태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 자기가 인생에서 저지른 실수와 만성적 분노를 어머니 탓으로 돌리는 한, 스탠은 어머니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 셈이 된다. 그런데 더 심각한 사실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즉 몰인정할 뿐만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던 어떤 사람에게 자기의 힘을 계속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탠의 경우처럼 자기를 괴롭힌 사람에게 자기 감정을 지배할 권리를 위임하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본다. 자신을 부정하게 대한 이들에게 자기를 좌지우지할 힘을 양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다.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동업자에게, 당신을 속여온 연인에게 그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은 부당하게 받은 상처로 인한 문제를 푼다면서 사실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스탠이 당면한 과제는 자기 인생을 확실히 살아가면서 상처에서 회복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탠이 해결한 방법인 ‘탓하기’가 그를 도중에 멈춰 서 있게 하고 있었다. 탓하기는 상처 입힌 사람과의 관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스탠으로 하여금 무력감과 고통을 느끼도록 했다.
‘나를 위한 선택 용서 용서- 용서는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원하는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