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하면 울화가 치밀게 된다.
첫째, 내 인생에는 제발 없었으면 싶었던 일이 일어나고, 둘째, 그 일로 너무 많이 신경을 쓰면 -나는 이것을 ‘어떤 일에 마음 속 공간을 너무 많이 내 준다’고 표현하는데- 반드시 울화가 생긴다.
내가 개최한 용서 세미나에 참석한 샤를린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전남편과의 생활이 얼마나 지긋지긋했는지 쉴 새 없이 얘기했다.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남편이 엊그제 그녀를 떠난 것만 같았다. 그런데 사실은 남편이 이혼하고 집을 나간 지 5년이나 지나 있었다. 더 이상 전남편과 부부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샤를린은 마음 속 가장 좋은 장소를 그에게 내준 상태에 있었다. 이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두 사람은 사실상 아직도 함께 살고 있는 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작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남편을 저만큼 많이 생각한 적이 과연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당신도 혹시 샤를린처럼 행동하는 부분이 있는지?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하는지? 불만스러운 일에 대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지? 과거지사를 생각하는 데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 스스로 싫증이 날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는지? 남들이 당신이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는 걸 듣느라 질린 적은 없는지?
당신의 마음을 집이라고 상상해 보라. 울화와 상처에게 빌려줄 공간의 크기를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자. 당신은 이 집의 주인이므로 당연히 집세를 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처와 울화에게 어떤 방을 내주고 싶은가?
지난 주에 얘기했던 관제탑의 화면을 상기해 보자. 당신이 품고 있는 울화가 바로 착륙을 거부하는 항공기다. 이 비행기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채 당신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로인해 당신은 당신의 삶에 부여된 몇 가지 멋진 일에 감사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버린다는 점이다. 삶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울화가 우리에게 끼치는 가장 큰 피해다. 지금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우리가 자주 트는 방송은 결국 우리의 습관이 되고 만다.
자신을 괴롭힌 사람을 미워하고 자기가 인생에서 잃어버린 것을 한탄하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자기를 아껴주는 이들에게 감사하지 않고, 그들에게 관심을 쏟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슬퍼진다. 여기서 한 가지 시실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나는 당신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외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남들이 당신에게 상처 입힌 사실을 부정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미 입은 상처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아픔만 심해지고, 나아가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리면 영영 고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다. 살면서 겪은 아픈 일을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리지 말라는 얘기다. 어떤 일에 골몰하는 것은 그 일에 당신을 지배할 힘을 부여하는 셈이 된다. 무엇을 기억하는가? 어떤 일에 집중하는가? 하는 것을 당신은 티비 체널을 바꾸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조절할 수 있다. 울화 방송을 보는 데 익숙해 있다면 세상이 온통 울화로 가득해 보이기 십상이겠지만, 만약 용서 방송으로 채널을 돌린다면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나를 위한 선택 용서 용서 - 용서는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원하는가?’중에서
다음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하면 울화가 치밀게 된다.
첫째, 내 인생에는 제발 없었으면 싶었던 일이 일어나고, 둘째, 그 일로 너무 많이 신경을 쓰면 -나는 이것을 ‘어떤 일에 마음 속 공간을 너무 많이 내 준다’고 표현하는데- 반드시 울화가 생긴다.
내가 개최한 용서 세미나에 참석한 샤를린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전남편과의 생활이 얼마나 지긋지긋했는지 쉴 새 없이 얘기했다.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남편이 엊그제 그녀를 떠난 것만 같았다. 그런데 사실은 남편이 이혼하고 집을 나간 지 5년이나 지나 있었다. 더 이상 전남편과 부부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샤를린은 마음 속 가장 좋은 장소를 그에게 내준 상태에 있었다. 이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두 사람은 사실상 아직도 함께 살고 있는 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작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남편을 저만큼 많이 생각한 적이 과연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당신도 혹시 샤를린처럼 행동하는 부분이 있는지?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하는지? 불만스러운 일에 대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지? 과거지사를 생각하는 데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 스스로 싫증이 날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는지? 남들이 당신이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는 걸 듣느라 질린 적은 없는지?
당신의 마음을 집이라고 상상해 보라. 울화와 상처에게 빌려줄 공간의 크기를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자. 당신은 이 집의 주인이므로 당연히 집세를 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처와 울화에게 어떤 방을 내주고 싶은가?
지난 주에 얘기했던 관제탑의 화면을 상기해 보자. 당신이 품고 있는 울화가 바로 착륙을 거부하는 항공기다. 이 비행기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채 당신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로인해 당신은 당신의 삶에 부여된 몇 가지 멋진 일에 감사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버린다는 점이다. 삶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울화가 우리에게 끼치는 가장 큰 피해다. 지금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우리가 자주 트는 방송은 결국 우리의 습관이 되고 만다.
자신을 괴롭힌 사람을 미워하고 자기가 인생에서 잃어버린 것을 한탄하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자기를 아껴주는 이들에게 감사하지 않고, 그들에게 관심을 쏟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슬퍼진다. 여기서 한 가지 시실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나는 당신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외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남들이 당신에게 상처 입힌 사실을 부정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미 입은 상처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아픔만 심해지고, 나아가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리면 영영 고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다. 살면서 겪은 아픈 일을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리지 말라는 얘기다. 어떤 일에 골몰하는 것은 그 일에 당신을 지배할 힘을 부여하는 셈이 된다. 무엇을 기억하는가? 어떤 일에 집중하는가? 하는 것을 당신은 티비 체널을 바꾸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조절할 수 있다. 울화 방송을 보는 데 익숙해 있다면 세상이 온통 울화로 가득해 보이기 십상이겠지만, 만약 용서 방송으로 채널을 돌린다면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나를 위한 선택 용서 용서 - 용서는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원하는가?’중에서